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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몰 입점 관련

복지몰 벤더의 딜레마 43 : 어떤 완판

대학교 2학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지방에서 올라온 나는 하숙을 하고 있었고, 하숙비를 아끼기 위해 고등학교 1년 선배와 같이 방을 썼는데,
마침 그 선배가 동문회장을 맡고 있었다.

9월인가 10월쯤 다른 여대의 고향 동문회와 조인트 야유회를 같이 가기로 한 날 아침이다.
당시 삐삐나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다보니 아마도 공중전화나 집전화로 각 학교에서 몇명씩 가느냐,
그 숫자에 맞춰 회비도 걷고 김밥도 준비하고, 레크레이션도 준비해야 했던 상황 같다.

문제는, 바로 전날, 모 대학교와의 정기 체육대회가 있었고, 이겼는지 졌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직장에 다니는 선배들까지 학교로 와서 술을 먹다보니 새벽 혹은 아침까지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시기라도, 혈기만 믿고 마시는 술에 장사는 없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도저히 일어나기 싫고, 야유회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같은 방을 쓰는 고등학교 선배가 동문회장이니 안 간다고 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 선배를 따라서 성북역에 10시쯤 도착해보니, 그 선배와 나 딱 두 사람만 나와 있었다.
여대생과의 조인트 야유회, 무척 기대되는 이벤트임에도 불구하고,
나오기로 했던 선배, 동기, 후배들에게 아무리 전화해도 피곤하고, 술이 덜 깨서 못 오겠다고 한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조인트 야유회를 가기로 했던 여대생들 5명이 왔는데,
이거 조인트 야유회를 주최한 쪽에서 2명만 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보니,
다시 친구, 선배, 후배들 아무리 전화해도 오겠다는 말만 하고 오지 않는다.

모임 주최를 선배가 했으니, 모든 책임은 그 선배한테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더 큰 문제는 대략 50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인원파악을 했었기에) 해서 김밥이 50개 도착한 것이다.

당시로는 <김밥나라>나 <김밥천국>같은 체인점이 없던 시절이니
김밥을 미리 주문했어야 했고, 주문한 대로 50인분의 김밥이 도착한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50명쯤 와서 회비를 걷어서 차비와 김밥과 기타 경비를 쓰면 대략 하루를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는데,
남녀 합쳐서 7명인 상황에서 금전적으로 펑크나는 건 당연하더라도 김밥 50개는 도저히 먹을 방법이 없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김밥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에 
같이 온 여학생중 가장 귀여운 여학생을 데리고 김밥을 팔러 다녔다.

다행히 모임 장소가 <성북역>이었고, 당시 <대합실>에는 춘천이나 가평을 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판매할 대상은 그 사람들이었다.

"안녕하세요? 대학생인데요, 모임에서 놀러가기로 했는데, 사람들이 적게 와서 우리가 준비한 김밥을 팔려고 합니다"
"1개 얼마이구요, 2개 얼마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되는데, 용기가 부족해서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김밥을 팔지 못하면, 놀러갈 돈도 없고, 김밥도 상할 것이고, 문제가 많이 생기니 뒤로 물러설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옆에는 5명 중 가장 귀엽고 똘똘한 여학생이 있지 않은가?

한 10명쯤 정도에게 계속 팔려고 같은 말을 하고 다녔는데, 아무도 사지 않았다.
그러다가 커플로 보이는 사람이 김밥을 2개 산다.
기차역이었으니 아마 기차를 타고 가면서 먹으려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개시를 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굳었던 입이 슬슬 풀리면서 자신있는 목소리로 김밥을 팔았는데,
이제는 귀엽고 똘똘한 여학생이 옆에서 한 몫 거들기도 하니 한 시간도 안 되어 40개쯤 판 것 같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선배가 한 마디 한다.

"야, 이제 그만 팔아, 우리 먹을 건 남겨놔야 되잖아."
남녀 7명이고, 혹시 부족하면 안 되니 10개쯤 남겨놓은 상황에서 선배가 판매중단(?)을 지시한 것이다.

그래놓고 보니, 50개에서 40개를 판매한 것이고, 10개는 우리가 먹을 것이었으니,
최소한 판매할 수 있는 분량은 다 판매한 것이다.

50개의 재고를 준비한 상황에서, 자칫 시간을 놓치면 떨이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떨이까지는 안 했고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본전은 했을 것 같다.

유통인들이 쓰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한 시간 동안 준비한 물량 다 소진했고, 땡처리 안 했고, 현금으로 다 판매한 것이다.

요즘 추석 특판 관련하여 여러 곳에 제안서를 보내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싯점에서
문득 당시에는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이거.. <성북역>에 내가 가지고 있는 제품 다 들고 가야 하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