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갑자기 오래 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영업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사무실로 오시라고 해서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그 분은 내가 한 때 잘 나가던 시절 굉장히 친했던 사이였는데, 나에게 이런저런 부탁도 많이 했었고,
들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많이 들어주다 보니 그 덕분에 술도 많이 마시게 되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갑과 을은 존재하는데, 당시 나는 이름하여 갑의 위치에 있었고,
그 분은 반대인 을이였다보니, 접대를 핑계로 양주를 마시는 곳으로 자꾸 이끌었다고나 할까.
오늘 그 분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만난 지도 거의 20년 정도 되었고,
그 분이 당시 을의 입장에서 산 양주도 무척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분 입장에서 무척 비싸게 산 양주를 대체 몇 병 샀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건방진 표현을 하자면, 당시에는 그런 분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분들 중 하나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업 영역을 확장하다가 예상했던대로 투자가 들어오지 않아 무척 고전하던 시절.
사업을 접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에도 그 분이 자주 사무실에 찾아왔었다.
실제 그 분이 관련했던 업무를 중단했던 상황이라 사업상 갑과 을이 될 수 없었고,
내가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던 상황이었는데도 술을 같이 먹자고 띄어띄엄 연락해왔다.
당시 사무실 근처에는 퇴근 무렵쯤 트럭을 개조한 닭꼬치구이 가게(?)가 어김없이 등장했는데,
거기에서 닭꼬치구이를 몇 개 시켜서 의자도 없다보니 서서 소주 한잔하는 식이었다.
가끔은 추운 겨울 날 추위를 달래기 위해 오뎅국물도 마시며 소주 한병씩을 먹었던 것 같은데.
묘하게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된다.
개조한 트럭 앞에서 서서 먹는 소주 한잔.
멋있게 표현하자면 소주를 마시는 스탠딩 바(?)^^
그 분이 수십만원씩 써가며 양주 사준 건 기억이 별로 없는데,
트럭에서 파는 꼬치구이에 소주를 사준 기억이 나는 건 아마도 그 분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분한테 그걸 배운 다음부터는 나도 사람을 만나는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했다.
흔히 어떤 관계에서나 갑과 을이 존재하고, 유난히 갑질(?)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한테는 양주를 사줘도, 당장 영업상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의미가 없다.
그런 사람한테는 양주를 사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줄을 서 있을 것이고, 나는 그 중 하나일 뿐이고,
사주더라도 <몇 번째 번호표였지?>하고 기억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나는 오히려 갑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상황이 바뀔 때 일부러 자주 연락한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사주더라도, 갑과 을이 아닌 순간 더 자주 보려고 연락한다.
양주로 접대한 결과는 휘발성이 강해 오래 가지 못 하고,
소주로 접대한 결과는 휘발성이 덜해 오래 간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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